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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부마, 조선 숨은 실세… 전시엔 경호실장 역할” - 동아 2017/10/20
글쓴이: 관리자
조회: 30
등록시간: 2017-10-24 17:28:56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부마 12명 일대기 다룬 <조선 왕실의 백년손님> 출간
선조 후궁 인빈 김씨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해 부마가 된 동양위 신익성. 예조판서를 지낸 신흠(1566∼1628)의 아들로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로 나중에 청나라에 압송됐다가 풀려났다. 역사비평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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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원수 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을 하지 못한다.”?

 

조선 선조의 사위로 정숙옹주의 남편인 신익성(1588∼1644)이 어느 날 옥관자가 붙은 망건을 아내 앞에 던졌다. 옥관자는 정3품 이상이 망건에 달 수 있는 물건. 옹주와 혼인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지만 과거 응시에 제한을 받고 보통의 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었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의 신세 한탄이다. 위(尉)는 부마에게 주는 작위다.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국민대 박사 수료·사진)은 부마와 그 가문에 주목한 신간 ‘조선 왕실의 백년손님’(역사비평사)에서 부마 12명의 일대기를 담았다.

부마의 처지는 ‘학무소용(學無所用), 재무소전(才無所展)’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학문이 뛰어나도 쓸 곳이 없고, 재능이 뛰어나도 펼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성종대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부마의 정치 참여는 법으로 금지됐고, 부마는 의약을 담당하는 혜민서 제조(提調) 등 정치와 무관한 관직을 으레 맡았다. 그러나 책은 부마와 부마 가문이 왕의 최측근 근위 세력으로 정치에 음양으로 깊숙이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책에 따르면 부마라는 용어는 한 무제 때 처음 설치된 관직명에서 유래했다. 원래 임금의 수레를 모는 말을 담당하는 관직이었으나 그 관직을 주로 공주와 혼인한 사람이 맡으면서 왕의 사위를 뜻하는 말이 됐다. 조선의 부마도 왕과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는 도총부 총관(摠管)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신 연구원은 “전시에는 부마가 오늘날 대통령경호실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동양위 신익성도 이괄의 난 때 인조와 인목대비를 호위했다. 인조는 고모부인 신익성에게 보검과 궁시(弓矢)를 내려주면서 “곁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신익성은 정묘호란 때도 소현세자를 호종해 전주로 피란을 갔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인조 곁을 지켰다. 선조의 또 다른 부마 해숭위(海嵩尉) 윤신지(1582∼1657)는 비빈과 왕손들이 피한 강화도로 건너가 청나라 군과 싸웠다.  

평시에도 부마의 아버지나 자손 등 부마 가문이 왕의 정치적 후견인으로서 왕실의 근위세력이 됐다. 효종은 서인계 관료 가문에서 부마를 간택한 뒤 그 가문의 인사들에게 의정부의 삼정승을 독점적으로 맡겼다. 영조는 일곱 부마의 가문 인사를 모두 탕평파의 핵심 세력으로 양성했다.

이는 대군(大君), 군(君)을 비롯한 종친이 역모에서 새로운 왕으로 추대될 소지가 상존했기에 종친의 처가도 국왕의 은근한 견제를 받았던 것과 대조된다. 또 왕비 가문이 소수였던 데 비해 공주, 옹주의 수만큼 간택된 부마의 가문은 수도 많았다. 

신 연구원은 “부마 자신은 벼슬이 제한돼 전해지는 사료가 많지 않고, 그 탓에 그간 연구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다”며 “조선 정국 운영의 숨은 실세인 부마 가문의 동향을 보면 정치사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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