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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부패한 꼴 못 보던 매천 황현의 120년 전 망국사(한겨레 2016-09-01)
글쓴이: 관리자
조회: 558
등록시간: 2016-09-06 09:37:01

춘추필법의 동학농민혁명 통사 

94년판 ‘오하기문’ 완전 새 번역 

방대한 고사·옛지명·문헌 고증 
원문 오류도 바로잡아 분량 2배

동학농민군 ‘도적’이라 표현했지만
권력 농단과 부정부패 비판 ‘신랄’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원문 역사비평사 제공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원문 역사비평사 제공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역사비평사·2만8000원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대할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이 글들은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매천 황현(1855~1910)이 남긴 유서와 시다. 그의 대표작처럼 알려진 <매천야록>의 저본이 됐다는 <오하기문>(梧下記聞)이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 출간됐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재야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매천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주요 사건에 대해 편년체와 강목체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서술한 당대사”로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통사’”(해제자 박맹수 원광대 교수)다.

 

1892년 동학교도들 봉기 현장인 전북 삼례에 조성된 역사광장 조형물 역사비평사 제공
1892년 동학교도들 봉기 현장인 전북 삼례에 조성된 역사광장 조형물 역사비평사 제공

“일반적으로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민씨들이 전국 큰 고을의 수령 자리를 대부분 독차지했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미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저 형식(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충주로 피신할 때 따라간 무관 민형식)이라는 놈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라고 불렀을까. 그것도 모자라 ‘미친 호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1892년, 고종29년)

 

자신만의 선명한 관점을 세우고 동학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장면에서 춘추필법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하기문>은 1860년부터 동학혁명 종료 직후인 1895년 3월까지와 1895년 4월 이후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번역된 것은 1895년 3월까지이며, 그 뒷부분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오동나무…>는 20여년 전인 1994년 <번역 오하기문>이란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같은 번역자가 옮긴 이번 책은 단순한 수정·보완이 아니라 이전 번역본을 “아예 무시하고 완전히 새롭게 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나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어와 고지명, 고문헌들이 등장해 해독하기 어려운 한·중·일 3국의 인용 사료들을 매우 철저하게 찾아 꼼꼼하게 확인하는 고정(考訂) 작업을 벌였다. <조선왕조실록>과 <동경대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사서삼경과 24사 등 방대한 중국 전적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의 일본 사료들도 검토했다.

 

손화중(사진 오른쪽) 역사비평사 제공
손화중(사진 오른쪽) 역사비평사 제공

그리하여 이번 책에서 옮긴이는 저자 매천 황현이 잘못 적거나 빼버린 구절들까지 샅샅이 찾아내 교정했다. 필요할 경우 최근 연구성과들까지 섭렵해 보완했고, 다른 관점의 해석까지 소개한다. 예컨대 체포당해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대역죄인이라며 자신을 사정없이 심문하는 박영효에게 이렇게 되받아친다. “도 없는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의 평등적 정치를 잡은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사(淫邪)에 소비하는 왕세 공곡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중인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서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 도리에 위반이라,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정부를 고쳐 선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들였나니 네 죄 중 가장 중대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배항섭 ‘동학농민전쟁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이런 내용은 <오하기문>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되도록 지금의 우리말로 내용을 풀어 써 가독성을 크게 높였다. 여기에 적지 않은 분량의 인명록과 제도·기관·관직 등의 주요 용어 사전까지 붙였다. 그 결과 전작보다 분량이 거의 갑절로 늘었다. 그럼에도 전작보다 훨씬 읽기 편해졌고 내용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야말로 <오하기문>과 매천, 그리고 당대사를 종합적·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해(1894) 봄, 돈을 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신고식까지 치른 영남의 어떤 유생이 있었다. 그런데 민영휘는 그 유생이 가난하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했다. 그 유생은 밤새 죽을힘을 다한 끝에 마침내 어느 부유한 상인을 보증인으로 내세웠다. 영휘가 비로소 다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었다.”(4월30일)

이 유생과 달리 매천 자신은 이렇게 부패한 세도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떠나간다. 매천은 1883년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뽑혔으나 당시 시관이 그가 뒷배 없는 시골의 힘없는 집안 출신인 걸 알고 2등으로 등수를 낮추자 낙향해버린다. 부친의 엄명으로 1888년 다시 성균관 생원시에 1등으로 뽑혀 성균관 관원인 생원이 됐으나 보장된 출세와 벗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향리로 내려가버렸다. 이후 평생 나라 녹을 먹지 않은 재야 선비로 살았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청국군과 싸운 성환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 용산 만리창(효창동)에서 승전 행사를 여는 일본군 역사비평사 제공
청국군과 싸운 성환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 용산 만리창(효창동)에서 승전 행사를 여는 일본군 역사비평사 제공

이 책의 또 다른 장점 가운데 하나는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매우 구체적이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동학교도들을 시종 ‘적’ ‘도적’이라며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매천은 그 준열한 역사인식에도 불구하고 분명 봉건 군주체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그는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고 오히려 열려 있으며 공정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도적들은 만날 때 서로에게 매우 공손한 예를 취했다.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똑같이 평등한 예를 행했다. 비록 나약하고 용렬한 사람이 접주 자리에 있어도 그 무리는 모두 자신을 굽히고 그를 섬겼다.”

 

옮긴이 김종익씨. 2008년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를 주요 사회적 이슈로 만든 계기가 된 케이비(KB)한마음 불법사찰의 희생자가 바로 그 회사 대표이사였던 그다. 옮긴이가 120여년 전의 기록이지만 기시감이 든다며 책에 쓴 얘기. “권력의 농단으로 부패의 극한까지 내달렸던 그 시대 몇몇 인물의 이름을, 권력을 사익 확대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오늘날 부패한 고위 관료들의 이름으로 환치하면, 120여년 전의 역사가 현실의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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